KIN

구비문학 개념

구비 문학은 '단어로 된 문학'을 의미하며, 구전 문학이라고도 알려진 서면 기록 문학과는 구별된다. 구비와 구술은 대체로 같은 뜻이다.

 

구술과 구술을 구분하기 위해 구술은 '말로 전한다'는 뜻이지만, 구술 문학은 대대로 전해졌다고 할 수 있어 구술 문학보다 더 적절한 용어다. 구비문학은 유동문학, 박문학, 첨가문학이라고도 불리지만, 구비문학이 계속 변화하고 개별 저작이 축적된 변화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용어들이 '구비문학'의 한 측면을 대신할 수 있다.

 

구빌 문학은 문학의 기본 형태이다. 그러므로 속담, 수수께끼, 이야기, 민요, 무, 판소리, 민요와 같은 것들을 기부 문학이라고 부른다. 국문학자 조동일은 구전을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말, 이야기, 노래, 놀이 이다. 

 

따라서 단순한 이야기와 노래는 일반적으로 대중문화이지만, 인형극, 탈춤, 무당굿과 같은 광대나 무당의 전통적인 전통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층민들의 의식을 풍부하게 표현하고 있다.

 

원래는 구부 문학에 불과했고, 지금도 많은 민족이 그 단계에 있지만, 역사가 발전하면서 구부 문학을 기반으로 한 다큐멘터리 문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 이후 문학사의 발전은 문학의 비중이 점점 커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구부문학이 낙후된 문학의 사고방식이 단순하다는 뜻은 아니다. 문학이 양반이나 지식층의 문학이라면 구비 문학은 민중의 문학이다.

 

오랫동안 문자 자체를 이용한 글쓰기나 독서는 귀족이나 지식인이 아니면 할 수 없었으며, 그 기간 동안 구부문학의 창작, 전달, 전환, 수용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이 두 문헌 사이의 우열을 논하기는 어렵다. 정교한 정도에서 지식의 양으로 보면 기록문학이 앞서겠지만 일반 대중이 고려하는 절박한 문제는 구부문학의 책임이다.

 

지금까지, 문학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종종 다큐멘터리 문학 그 자체를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기록문학은 구비문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구비문학의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할 때 견실하게 발전해 왔다.

 

문헌만으로 굳어진 문학은 지식의 열거에 빠지거나 공허한 형태로 남을 우려가 있고, 외국 문학의 과도한 영향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문학에 위기가 닥쳤을 때 구부문학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새로운 다큐멘터리 문학이 등장해 위기를 극복했다.

 

이를 바탕으로 구부 문학은 대중적일 뿐만 아니라 민족 문학의 토대이기도 하다. 구부 문학의 연구는 문학의 기본적, 보편적, 민족적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대중적 삶이나 민족적 창조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한다.

 

역사

구빌문학은 민담, 무당의 굿판, 판소리 사설, 탈춤 대사, 속담, 수수께끼 등 농담의 웃음에 일탈이 없다면 어느 한 갈래가 활력을 잃는다.

 

우리 민족에게 재치 놀이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러한 놀이는 고려와 조선 왕조를 통해서도 선호되었다. 잡희, 감암백희, 규식지희, 소학지희 등으로 불렸으며 고려인 이색 작가의 시 '산대잡극'은 재담의 소통 경로를 짐작케 한다. 조선 선비들이 처음 녹음한 것은 판소리나 탈춤 같은 공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위의 풀처럼 시장에 떠도는 구술과 재미있는 이야기들의 소재가 되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항간의 농담과 이야기를 백성들의 소중한 생각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계서담』 『청구야담』 『동야휘집』 『용재청화』 『필원잡』 『어야담』 『개관잡』 『파저담』 등이 있다.

 

현재 우리가 수집하고 연구할 수 있는 자료들은 대부분 조선 후기와 18세기 자료들이다. 구부 문학에 대한 이러한 연구와 연구가 학문적 차원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선진국에서였다. 18세기 말, 이들 국가에서는 산업화가 시작되었고, 근대 민족 문화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산업화가 시작되자 옛 것을 간직하고 사라져가는 문화에 애착을 가지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영국에서는 이 운동이 처음 도입되었고, 민속이라는 단어는 영국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모범으로 삼았던 중세 단문화에서 벗어나 자신의 민족 문화를 찾으려는 운동이 낭만주의 운동과 함께 나타나 구부 문학을 민족 문화의 근원이나 모체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운동은 독일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구부 문학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식민지화 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제국주의였고, 마지막은 식민지화였던 민족주의였습니다.

 

이 세 가지 중 첫 번째는 17세기와 19세기 동안 약간의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김만중, 홍만종, 정약용 등 동양의 중세 단문화에서 벗어나 민족문화의 독자적인 면을 명확히 부각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 운동은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라틴 문화의 통합과 고전 아랍 문화의 통합에서 벗어나려는 유럽인들의 시도와 공통점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송석하, 손진태 등 많은 민간 학자들이 구부 문학을 연구하고 연구하여 위기에 처한 민족 문화를 되살리는 문화 운동을 일으켜 상당한 연구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민요, 설화, 탈춤뿐 아니라 무가집도 버려야 할 유산이 아니라 민족의 지혜와 창의력을 전달하는 자랑스러운 전통이라는 인식이 싹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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